가지마오
1975년의 가요정화운동과 대마초 파동으로 황폐화된 음악계에 한 줄기 서광을 비쳐 준 것은 삼 형제로 구성된 산울림이었다. 10대 중반부터 작곡을 시작했던 이 형제들은 김창완의 대학 졸업 기념으로 만든 데뷔 앨범으로 한 순간에 가요계를 전복시켰고 우리 모두를 충격으로 몰아넣었다. 섹스 피스톨즈(Sex Pistols)의 역사적인 데뷔 음반과 동시대성을 획득한 이들의 데뷔 음반은 끝없는 창작욕을 발현한 첫 번째 단추가 되었으며, 신중현이 열어 놓은 록의 세계를 아마추어의 경지에서 마음껏 조리한 역사적인 음반이 되었다. 둘째 김창훈의 곡인 ‘나 어떡해’를 부른 샌드페블즈가 대상을 받은 제1회 MBC 대학가요제에 ‘문 좀 열어 줘’란 곡으로 출전했지만, 김창완이 졸업생 이여서 자격미달로 실격한 이들은 자신들의 기념 음반을 가지고 싶었던 나머지 친척들을 졸라 앨범 제작비를 구걸했고 그간 만들어 놓았던 150곡 중 몇 곡을 추려 데모 테이프를 만들었다. 그리곤 가장 가까운 레코드 회사인 서라벌을 찾아가 자신들의 소원을 얘기했다. 이들의 데모 테이프를 들어 본 사장은 아무 조건 없이 음반을 만들어 주겠다며 손수 팔을 걷어 부치고 나섰고 이들의 이름을 산울림으로 지어 주었다. 하지만 이들이 가져온 악기는 연주를 하고 나면 줄이 풀려 끝까지 마칠 수가 없었다. 고민 끝에 평론가 이백천에게서 팬더사의 스트라토 기타와 암페그에서 만든 베이스를 빌려온 이들은 하루만에 녹음을 끝마쳤으며 음반의 성공을 예상하지 못한 채 본격적인 사회인이 되기 위한 준비에 들어갔다. 하지만 그렇게 탄생한 이들의 데뷔 음반은 상상을 초월하는 성공을 거두며 삽시간에 팔려 나갔다. 그리고 명반으로 꼽히는 2집을 4개월만에 내놓았으며 역시 파격과 혁신의 메아리로 소리를 내지르며 커다랗게 산울림을 자아냈다. 이것은 2집이 나온 지 6개월만에 발매된 3집의 ‘그대는 이미 나’로까지 이어진다. 동생들이 군대에 가자 산울림은 제대로 활동을 할 수가 없었다. 4집은 각종 드라마와 영화, 연극 등에 쓰였던 주제곡들을 모아 편집한 음반으로 발매했고 5집은 동생들이 휴가 나온 사이 녹음을 끝내야 했다. 데뷔 음반의 폭발적인 반응에서 멀어진 듯한 이들의 인기는 6집의 ‘창문 너머 어렴풋이 옛 생각이 나겠지요’, 동생들이 제대하고 같이 만든 7집의 ‘청춘’, 8집의 ‘내게 사랑은 너무 써’와 같은 스탠더드 류의 히트곡으로 계속 이어지며 초창기의 실험정신이 가득했던 곡들보다는 대중성이 뛰어난 곡들로 꾸며지며 계속 전성기를 누린다. 하지만 3인 밴드 최상의 사운드를 들려주며 우리 나라 헤비메탈 사운드의 포문을 열었다고 평가되는 9집이 상업적으로 실패하자 이들은 뿔뿔이 흩어졌고 혼자 남은 김창완은 < 기타가 있는 수필 >이란 솔로 앨범에서 ‘어머니와 고등어’를 히트시키며 이후 계속 되는 솔로 여정의 첫 삽을 뜬다. 그는 이어 본인이 혼자 만든 산울림 10집에서 감상적 발라드 ‘너의 의미’를 히트시킨다. 그는 또한 가능성 있는 신인들을 모아 포크 그룹 꾸러기들을 만들어 활동에 들어갔으며 ‘아주 옛날에는 사람이 안 살았다는데’라는 긴 제목의 곡으로 100일간의 장기 공연을 치뤄 냈다. 밴드 음악의 감독으로 산울림을 지휘한 김창완의 한편에는 동요라는 장르가 있다. 처음의 기획의도는 기존의 동요를 재해석하는 것이었지만, 대부분의 곡들이 외국 곡이라는 한계를 알게 된 그는 직접 동심의 세계를 표현한 곡들로 시장을 두들겼고 ‘개구장이’, ‘산할아버지’, ‘안녕’ 등과 같이 정규 앨범의 히트곡 못지 않은 인기곡들을 양산한다. 그의 동요 앨범들은 그의 천진무구한 창작적인 감수성이 뽑아낸 새로운 시도였다. 9집 이후 김창완 혼자서 작업했던 산울림은 과거의 뮤지션들에 대한 재평가가 이루어지면서 다시 합체식을 가졌다. 국내에서 트리뷰트를 받은 몇 안 되는 아티스트의 반열에 오른 이들은 ‘기타로 오토바이를 타자’로 노익장을 과시했으며 ‘내 마음’에서 보여준 김창훈의 메탈성 보컬로 오랜만에 원초적인 삼 형제의 힘을 발휘하며 그 동안 잊고 있었던 음악 자체의 순수성을 엮어낸다. 그리고 폭풍 속의 댄스씬을 빠져 나온 우리는 깨닫게 되었다. 우리에게는 산울림이 있었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