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희은 1991

70년대 김민기의 페르소나로 등장, 을 비롯한 수많은 히트곡과 함께 포크싱어로서의 확고한 위치를 차지했던 양희은은 1980년대 자신의 도미, 와병 등으로 인해 음악생활을 잠시 주춤하게 된다. 그러나 1985년 하덕규와 함께 작업한 [양희은의 새노래 모음]에서 , 처럼 유려한 곡들을 통해 그는 여전한 자신의 존재감을 확인시켜 주었고, 1991년 뛰어난 기타리스트이며 디렉터이기도 한 이병우를 통해 자신의 음악적 내공이 만만치 않음을 다시 한번 보여주었다. 오로지 이병우가 쓴 곡과 기타만으로 음반 전체를 밀고나간 고집도 놀랍지만 음반은 사람의 목소리와 기타만으로도 충분히 채워지고 비워질 수 있다는 사실을 확인시켜준다. 젊은 날 씩씩할만큼 곧고 우뚝했던 그의 목소리는 세월의 풍상 앞에서 비바람을 맞으며 기운이 쇠했지만 그만큼의 연륜이 주는 무게감이 있다. 청년문화의 상징에서 돌아와 국화 옆에선 누이처럼 “우리의 젊은 가슴속에는 수많은 꿈이 있었지”라고 털어놓는 그의 목소리에서 느껴지는 쓸쓸함은 시간의 더께가 쌓이지 않으면 결코 닿지 못할 지점이다. 양희은의 앨범임과 동시에 이병우의 뛰어난 재능을 증명하는 8곡의 단아한 단편집은 몇몇 귀 밝은 이들의 새벽을 달래는 저주받은 걸작으로 잊혀질뻔했으나 가슴 시린 이별 후일담인 가 뒤늦게 히트하며 더 많은 이들에게 알려졌고, 양희은이 70년대를 넘어 90년대까지 활동을 이어갈 수 있는 동력이 되었다. 해 지는 오후부터 밤 시간, 그리고 한 해가 끝나가는 11월부터 12월 사이 가만히 생각에 잠기며 듣고 싶은 아름다운 앨범이다. 말없이 번지는 눈물은 이 음반이 주는 보너스. (가슴네트워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