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날들 (Beautiful Days)
루시드 폴의 새 앨범 ‘아름다운 날들’은 발걸음이 무거운 이가 툭 던져놓은 일기장을 닮았다. 그 일기장을 펼치면 내 친구의 이야기 같기도 하고, 또는 내 이야기 같기도 한 풍경들이 담담하게 펼쳐진다. 지난 앨범 ‘레미제라블’이 창밖을 쳐다보는 루시드 폴의 시선이었다면, 5집 ‘아름다운 날들’은 자신의 내면으로 떠나는 순례자의 시선이다. 그는 5집 ‘아름다운 날들’을 통해 그 어느 때보다 자신의 이야기를 많이 하게 되었다고 말한다. 물론 그처럼 직접 곡을 만들고 노랫말을 붙이는 싱어송라이터가 만든 곡들은 어떤 것이나 자신의 이야기일 수밖에 없지만, 모든 창작자들은 자신을 조금쯤 숨기고 싶은 욕망을 느끼곤 한다. 화장을 하지 않은 얼굴로 사거리에 나선 여배우도 흘러내리는 머리카락으로 이마의 작은 흉터 정도는 감추고 싶은 법이니까. 그런데 ‘아름다운 날들’ 은 세찬 바람이 부는 들판에 서서 부르는 노래라서, 머리카락으로 감출 수도 없었다. 바람은 그를 어디로 이끌었을까? 그의 노래는 어두운 방, 작은 불빛 아래서 듣는 이야기 같이 진솔하고 직접적이다. 아픈 사람들은 그의 노래를 들으면 분명히 더 아파질 것이다. 하지만 그런 과정이 노래를 듣는 사람이나 노래를 만든 사람에게 결국에는 위로가 된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그것이 그의 음악이 우리 앞에 서는 방식이니까. 루시드 폴의 음악은 기타와 목소리가 주가 되는 노래이기 때문에 노랫말이 숨소리처럼 자연스럽게 들려온다. 그의 노랫말은 멜로디에 실려 가는 단어들의 우연한 조합이 아니라, 그 자체로 하나의 음악이 되는 필연성을 가지고 있다. 그는 서정적인 음유시인이지만, 때로는 그 이상의 가사를 토해낸다. 나지막이 읊조리는 그의 시어가 가진 아름다움을 더 빛내주는 건, 심장을 향해 곧장 달려드는 강렬한 표현들이다. ‘나를 흔들리게 하는 건 내 몸의 무게(외줄타기 中)’ 라는 노랫말이나, ‘해가 너무 빨리 진 걸까 이 하루가 너무 길었던 걸까 기억이 나지 않아 하나 달라진 게 있다면 어젯밤 담담히 멎은 사랑뿐인데(어디인지 몰라요 中)’ 라는 구절이나, 너무 시리고 아파서 숨이 멎을 정도이다. 소박하고 담담한 아날로그 감성의 노래 곳곳에 그런 표현들이 나타나 쉽게 잊을 수 없는 느낌들을 만들어낸다. ‘꿈꾸는 나무’의 노랫말은 편안하게 소파에 누워서 음악을 들을 수 없게 한다. 편하게 쉬고 있다가도 자리에서 일어나 가슴을 쓸어내리게 만드는 힘이 있다. 꿈꾸는 나무는 어느 조각가의 나무가 꾸는 꿈을 펼쳐낸다. 처음에는 아름다운 단어들, ‘따뜻한 집, 편안한 의자, 널찍한 배, 만원 버스 손잡이, 푸른 숲, 새의 둥지, ....... 어느 아이의 인형.’ 이 이어지다가 갑자기 ‘하지만 이 세상에서 되고 싶지 않은 게 내게 하나 있다면 누군가를 겨누며, 미친 듯이, 날아가는 화살’ 이라고 힘주어 말하고 만다. 이렇게 음악과 가사가 조화를 이루거나 때로 대립하면서 루시드 폴의 노래들은 그만이 만들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세상을 창조한다. 앨범의 첫 번째 곡인 외줄 타기는 처음에는 기타 하나로 만들었던 곡. 그는 5집 앨범 작업을 하는 기간에 소리가 좋은 스틸 기타들을 갖게 되어서 많은 영감을 얻었다고 한다. 앨범을 들으면 기타 소리가 투명하게 울려 퍼져서 연주자의 손가락 움직임이 일으키는 진동까지 들려오는 듯하다. 루시드 폴의 팬이라면, 그가 삼바를 지독하게 좋아한다는 것을 알 것이다. 그런 그가 이번 앨범에서는 ‘그리고 눈이 내린다.’를 선보였다. “드럼과 일렉베이스로 팝적인 느낌을 잃지 않으면서 탄탄과 판데이루, 땅보링 같은 전형적인 (삼바의) 악기들은 빼놓지 않았습니다. 망게이라의 삼바사운드에 한국어 가사를 잘 붙여보고 싶었고, 그래서 라임에도 신경을 안 쓸 수 없었어요. (루시드 폴)” 이어서 쿠반 음악에 대한 사랑은 다음 곡 ‘어부가’를 통해서 드러난다. “오마라 포르투온도 omara portuondo 의 음악을 듣고, 언젠가 저런 따뜻한 느낌의 쿠반볼레로를 한 번 써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어요. 처음부터 스타일을 정해놓고 쓴 곡.(루시드 폴)” 러시아 출신의 알렉산더 세이킨이 연주하는 아코디언의 비브라토가 낡은 극장에서 상영하던 옛날 영화 같이 아련한 추억들을 불러일으킨다. 평소 홈페이지에 ‘이 달의 생선’을 연재하고 있는 사람답게 어부가에서도 전작 ‘고등어’에 이은 생선 사랑이 반복된다. 그는 어릴 때 살던 바닷가를 떠올리며 어부가 되어 매일 밤 노래를 낚는 자신을 되돌아본다. 다음으로 김광민의 피아노 소리가 잔잔하게 마음을 파고드는 ‘어디인지 몰라요.’ 가 이어진다. 이 곡은 그가 ‘사람들은 즐겁다.’ 이후 처음으로 피아노로 써본 곡이었다고 한다. 그는 본래 미디로 곡을 썼는데, 피아니스트 김광민이 그 느낌을 최대한 살려서 아름다운 연주를 들려주었다고. 역시 이렇게 텅 비어 있는 느낌을 주는 피아노 소리는 아무나 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담담하고 쓸쓸한 고백, ‘그 밤’ 에 이어 ‘꿈꾸는 나무’는 조금 독특한 느낌을 준다. TV에서 나무를 깎아 여러 가지를 만드는 장인들을 보고 쓰게 된 곡이라고 하는데, “one chord 진행 곡을 꼭 써보고 싶었어요. 그래서 이 곡의 A part 는 근음은 일정하고 기타의 중간 음들만 규칙적으로 변하는 그런 스타일이에요. (루시드 폴)” 그래서 일견 단순하게 들리는 노래인데, 스틸 기타의 솔직한 핑거링 사이로 들려오는 아름다우면서도 몸의 어딘가를 찌르는 듯한 가사가 일품이다. 후반부에 플라멩코 느낌을 담고 있는 ‘불’에는 플라멩코에 어울리는 가사가 나온다. “나는 내가 두려워 나를 삼키는 뜨거운 불길.” 미선이 시절의 루시드 폴을 기억하는 팬이라면, ‘노래의 불빛’이 반가울 것이다. 그는 일부러 90년대 인디락의 느낌을 내고 싶어서 노련한 전문세션을 피하고 마이언트메리의 멤버들과 홍대인디씬의 세션스타 고경천과 같이 작업했다고 한다. 인디락밴드의 저예산 레코드에서 흔히 들려오는 평면적이고 어딘가 막혀있는 듯한 사운드를 내기 위해 일부러 노력했던 곡. 최대한 홈레코딩 효과를 내려고 기타 소리도 집에서 녹음한 데모 버전을 썼고, 베이스도 디스토션을 걸고, 드럼 사운드도 앰비언트 마이크 위주로 소리를 잡았다고. 아마도 이 노래는 자신이 처음 음악을 시작했던 시절을 떠올리면서, 그 후로 오랫동안 수고했던 자기 자신을 북돋기 위한 것이 아니었을까. ‘여름의 꽃’은 염전에서 영감을 받은 곡. 유희열이 인트로와 뒷부분에 등장하는 스트링 편곡을 해주었다. 루시드 폴은 마지막으로 꼭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며 이 이야기를 전해왔다. “이번 앨범세션에 많은 분들이 함께 해주셨는데, 20대 중반의 연주인 (신동진-드럼, 윤혜진-플루트)부터 70대 최선배 선생님까지 다양한 세대와 백그라운드의 연주인들이 함께 해주셨다.” 연주는 어쿠스틱 악기들이 주를 이루고 있어 결코 화려하거나 번쩍이지 않지만, 소박한 악기들이 만들어낸 음의 향연은, 밤에서 밤으로 항해하는 나그네들을 지켜보는 등대처럼 한없이 너그럽다. 등대는 가야할 곳을 가리키지 않고, 다만 배들이 자기 길을 가도록 멀리서 도울 뿐이다. 그의 노래들은 외롭고 아픈 기억들로 채워져 있기 때문에, ‘아름다운 날들’이라는 앨범 제목은 역설적이다. 또한 이 제목이 우리에게 말해주는 것처럼, 지난 아픈 날들은 음악을 통해 아름다운 날들로 재해석된다. 그의 음악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따뜻한 집, 편안한 의자”가 될 수는 있어도, 결코 “누군가를 겨누며 미친 듯이 날아가는 화살”이 될 수는 없는 사람들이니까.